<작가 이야기>
박완서 문학의 백미는 우리 주변의 일상 속에 깊이 파고들어 소름끼칠 정도로 예리하게 그 단면을 싹둑 잘라서는 우리네 인간들이 갖고 있는 온갖 거짓과 그리고 가슴아플 정도로 소중한 진실들을 드러내 보여주는 데 있다.
이즈음 신세대 작가들의 발랄한 상상력과 때로는 환상적일 정도로 색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나 우리에게 익숙한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러한 상황들이 출현하면서 아무런 거리감없이 순식간에 그의 소설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40이 되어서야 문단에 등장한 그에게 남다른 점이 있었다면 처녀 시절부터 넘쳐나도록 싱싱하게 그의 오감을 채우고 있었던 감수성과 자의식이라고나 할까. 그의 삶은 순탄함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 시절을 살아온 그 세대의 사람들 치고 그만한 파란곡절을 겪지 않은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박완서에게 한국전쟁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참절한 아픔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총상을 입고 거의 폐인이 되어 돌아온 '똑똑했던' 오빠가 '이제는 배부른 돼지로 살겠다'던 다짐도 헛되이 여덟달 만에 죽어 나가고, 1.4후퇴의 서울에서 먹을 것을 찾아 남의 집 물건에까지 손을 대야 했던 시절을 그는 살아내야 했다.
배고팠던 그 시절의 우리네 일상과는 너무나 달랐던 별천지, 미군 피엑스에서 넘쳐나는 미군 물자와 문화에 비굴하게 길들여져 가던 시절도, 같은 피엑스 직원이었던 남자와 첫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던 아름다운 시절도, 그 남자가 끝내 암으로 세상을 떠났던 시절도, 뒤이어 1년 만에 아들을 가슴에 묻었던 시절도, 이제는 그의 가슴 속에서 정화되고 또 정화되어 박완서 문학의 거대한 봉우리 하나하나로 솟아나 있다.
이제는 천주교에 귀의하고 거처까지 한강을 내려다 보는 한적한 근교의 마을에 잡아 놓은 그에게 먼저 떠난 남편과 아들은 '저승길의 든든한 빽'으로 다시금 그의 삶 속에 돌아와 있다.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아픔도, 그리고 일상의 사소한 부딪힘이나 삐그덕거림마저도 모두다 문학이 되어 나오는 그의 '신기'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 진가를 더해간다. 삐그덕거리고 찌그덕거리며 살아가는 모든 소시민들에게 박완서 문학은 여전히 변함없는 길동무다.
분단, 여성, 우리네 삶에 대한 예각적 성찰을 이룬 소설계의 우람한 거봉
박완서는 불혹의 나이에 탁월한 분단소설 <나목(裸木)>으로 문단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 소설계의 우람한 거봉 하나를 이룬 작가이다. 활달하고 개성적인 스타일로 물신주의와 분단의 상처, 여성적 삶의 상처, 근대사의 질곡 등 다채롭고 의미있는 우리 사회의 국면들을 예각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을 거둔 그의 소설은 우리 문학의 한 수준을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어떤 이야기감이든 그는 나름의 스타일로 더 이상 손볼 필요 없을 정도의 소설적 형상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흔히 그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작가'로 불린다.
휴전선 이북인 경기도 개풍군에서 1931년에 태어난 박완서는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8세 때 서울로 이사와 매동국민학교를 다닌다. 아들을 성공시키고 딸을 신여성으로 키우겠다는 어머니의 강한 의지 때문이었는데, 그 시절의 자전적 에세이 소설이 바로 <엄마의 말뚝 1>이다. 일제말 소개령 때문에 개성으로 잠시 이사했다가 다시 서울에서 숙명여고를 졸업했고,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며칠 안되어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임시 천막대학을 잠시 다니긴 했지만 경제적 곤란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미8군의 PX 초상화부에 취직한다. 거기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되고 그 인연을 바탕으로 20년 후 처녀작 <나목>을 집필하게 된다. 그후 결혼하여 1남4녀의 어머니로 살던 그는 1970년 <나목>이 <여성동아>의 여류장편소설 모집에 당선되어 등단한다.
<나목>을 비롯하여 <목마른 계절>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부처님 근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아저씨의 훈장> <겨울 나들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은 전쟁 체험과 분단 상황을 다룬 작품들이다. <도둑맞은 가난> <도시의 흉년> <휘청거리는 오후> <욕망의 응달> 등에서 작가는 물신주의의 70년대적 풍경을 다룬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으로부터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작가는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 많은 작품들에서 여성 문제를 독특한 여성적 시각에서 묘파했다. 조선 말기에서 한국전쟁 직후까지 파란만장한 시기를 개성의 한 가족사의 운명을 통하여 점묘한 장편 <미망>은 박완서 문학의 한 절정을 보인다고 하겠으며, 집요한 기억의 묘사를 통해 난세의 개인사를 매우 치밀하게 복원해낸 장편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들이다.
박완서 소설에 대해 평론가 김치수 교수는 "혼자 살기 위해서 삶의 고통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살기 위해서 그 고통을 이기고자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작가의 재능이란 놀라운 것"이라고 말했다. (우찬제/문학평론가, 서강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