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엠 BONEY M
독일 출신의 프로듀서였던 "프랭크 패리언(Frank Farian)"은
'Baby Do You Wanna Bump'라는 곡을 스튜디오 뮤지션을 동원하여
실험적으로 만들어서 발표를 했다. 이 곡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당시 TV 방영 중이던
흑인 사물에서 착안한 "Boney M"이라는 가상의 그룹 이름으로 발표하였는데
뜻밖에도 실존하지 않았던 그룹의 노래가 의외로 대성공을 거두며 독일 싱글 차트 정상 을 차지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팬들은 "보니 엠"이 도대체 누구냐는 관심속에
"보니 엠"의 방송 출연을 원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에 당황한 그는 부랴 부랴 오디션을 통해서
여성 3명 남성 1명으로 구성된 네명의 서인도제도 출신 흑인들을 선발하여
실존하는 "보니엠"을 탄생 시켰다.
초기 여러번의 멤버교체를 거쳐 새로운 라인업으로 다진후 자마이카 출신의
"마르시아 바레트"와 "리즈 미첼" 서인도 출신의 한명뿐인 남성 보컬 "보비 파렐"
그리고 "메지 윌리암스"의 4인조로 1976년 'Daddy Cool'이라는 실존하는
보니엠의 첫번째 곡이자 보니엠 이름으로 된 두번째 싱글을 발표하고
디스코의 열풍에 편승하면서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보니엠은 당시 유럽과 미국을 장악하고 있던 유로팝과 디스코의 특징을 절묘하게 결합시키고
그 안에 서인도제도의 레게리듬을 접목시키면서 서정성있는 독특한 디스코 음악을 해나갔다.
70년대 그들의 인기는 대단해서 77년 'Sunny'가 차트1위, 'Love for Sale', 'Ma Baker',
'Belfast'도 동년 독일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영국 차트에서도 각각 2위, 8위를 기록하며
당시 미국 최고의 인기 밴드 비지스와 인기 경합을 벌이게 된다.
78년 그들은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우리 귀에도 친숙한 'Rivers of Babylon'을
처음으로 영국차트 1위에 올리면서 5주간 정상을 지켰고, 'Brown Girl in the Ring',
'Nightflight to Venus', 'Rasputin'을 연이어 히트시킨 그들은 동년 'Mary's Boy Child'를
정상에 올려놓으며 캐롤 그룹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심어주기도 한다.
이후 이들은 5번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81년경까지 긴 인기행진을 이어가던 이들이지만 세계적인 디스코음악의 몰락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인기의 하향세를 그리게 된다.
82년 'Happy Song', '10,000 Lightyears'와 같은 곡을 히트시키는데 그친
이들은 멤버 교체, 또 Frand Farian과의 결별 등 내부적인 요인들까지 겹치면서
86년 이후부터는 거의 히트곡을 내지 못했다.
'88년 프랭크 파리안이 다시 그룹에 가세하지만 이미 시대의 흐름이 그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80년대와 90년대 크리스마스 앨범과 베스트 앨범으로 근근히
그들의 이름을 팝계에 선보이고 있는 이들은 시대의 요구에 의하여 만들어졌던 그룹이었던
만큼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시대의 그룹으로 머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