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돼먹은 영애씨’의 미덕-중앙일보
TV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다. 싫어해서가 아니라, 평일 저녁 시간을 TV에 할애하기 어려워서다. 대신 주말이나 휴일에는 집 거실에서 뒹굴며 입맛에 맞는 채널을 찾아 리모컨을 눌러대는 게 낙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조사해 발표한 ‘2008년 TV 시청행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케이블방송 가구 가입률은 82.1%다. IPTV 가입률도 8.6%라니 열 가구 중 아홉 가구는 유료방송 서비스를 이용하는 셈이다. 우리 집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막상 메뉴만 풍부했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도 볼 만한 프로그램이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막돼먹은 영애씨’라는 드라마는 그런 내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거대 지상파 방송사가 편당 2억~3억원씩 들여 만드는 멜로 드라마도 아니고, 화려한 스타 연기자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케이블이라는 약점에다 방영 시간은 금요일 밤 11시다. 그런데도 등장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있어 눈길을 잡아끄는 힘이 대단하다. 나는 ‘프리즌 브레이크’나 ‘24’ 같은 미드(미국드라마)의 강력한 ‘스토리의 힘’을 높이 평가하는 쪽이다. ‘24’의 잭 바우어의 활약상을 보느라 뜬눈으로 지새우다 며칠 안 되는 휴가를 망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케이블에서 똑같은 시간대에 방영하는 ‘24’와 ‘막돼먹은 영애씨’를 놓고 고민하다 ‘막돼먹은…’을 택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한국 TV 드라마 중 ‘시즌 5’째를 기록하며 롱런하는 것은 ‘막돼먹은 영애씨’가 최초라고 한다. 지난해 말 끝난 ‘시즌 4’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 상까지 받았다. 환경특집 같은 기획프로그램 아닌 일반 드라마가 좋은 프로그램으로 선정된 것은 이례적이다.
이쯤 되면 ‘마이너리티의 뒤집기’ ‘비주류의 반란’이라 할 만하다. 거대 지상파 방송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야 한다. 온갖 희한한 억지 스토리로 시청자의 눈길을 구차하게 구걸하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분들부터 말이다. 오죽하면 같은 지상파의 개그 프로그램이 ‘막장 드라마’를 비꼬는 코너까지 신설했을까.
게다가 ‘막돼먹은 영애씨’의 편당 제작비는 4000만원대 후반이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박준화(35) PD에 따르면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스태프가 엑스트라로 겹치기 출연을 밥 먹듯 한다. 지상파 드라마들은 보통 사흘에서 일주일 걸려 한 편을 찍지만 ‘막돼먹은…’은 이틀에 마무리한다. 컴퓨터로 편집하는 것도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다. 일반 ENG 카메라는 하루 대여료가 70만원이 넘기 때문에 대당 대여료가 8만원가량인 6mm 카메라로 촬영한다. 그런데도 시청자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뚱뚱해서 톱 탤런트 이영애와 사뭇 대비되는 여주인공 영애 역의 김현숙은 개그 프로그램의 ‘출산드라’ 코너로 그나마 이름을 날린 적이 있다. 나머지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배우들이다. 비싼 스타 대신 ‘숨은 보석’들을 기용한 것이다. 덕분에 케이블로서는 대단한 2%대 시청률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당연히 광고도 잘 붙는다.
‘막돼먹은 영애씨’가 그냥 싸게, 재미있게만 찍는다? 아니다. 여배우 옷 벗기지 않는다. 비정규직의 설움도 실감나게 녹여 넣는다. 지상파 막장 드라마는 엄두도 내지 못할 사회성까지 갖춘 것이다. “드라마 출범 당시부터 시한부 인생이나 출생의 비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유턴하는 식의 ‘비(非)상식’이 없는 리얼리티 드라마를 만들자는 원칙을 지켜왔다”고 명수현(35) 작가는 말했다.
거대 지상파 방송사들의 신음 소리가 깊어가고 있다. 광고는 날로 떨어지고 케이블·위성 TV가 영역을 잠식해오고 있단다. 그러나 방만한 예산 운용, 드라마의 과도한 스타 의존, 극단적 스토리에 기대는 아이디어 빈곤 등을 자책하는 목소리는 드물다. ‘막돼먹은 영애씨’처럼 작지만 강한 ‘강소(强小) 드라마’에서 배워야 한다. 다양한 매체·장르가 수시로 영역을 섞고 넘나드는 미디어 복합시대에 기득권에만 안주해선 안 된다. ‘막돼먹은’에서 ‘잘돼가는’ 비결을 찾아야 한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