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야기>
정채봉은 1946년 전남 승주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바다, 학교, 나무, 꽃 등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이 바로 그의 고향이다.
그와 여동생을 낳고 어머니는 스무 살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버렸다. 아버지 또한 일본으로 이주하여 거의 소식을 끊다시피해서 할머니가 정채봉 남매를 키우게 됐다. 이러한 사실은 작가가 결혼 후 첫 아들을 얻고서야 아버지를 받아들였을 만큼 마음의 큰 상처로 남았다.
소년 시절, 채봉은 늘 혼자였다. 내성적이고 심약한 성격으로 학교나 동네에서도 맘에 맞는 한 두 명의 친구가 있었을 뿐 또래 집단에 끼이지 못하고 혼자 우두커니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어린 정채봉은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무와 풀, 새, 바다와 이야기하고 스스로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보기도 하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 '초승달과 밤배'의 주인공 '난나'에서 소년 정채봉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곤 한다.
엄마 아빠 없는 아이라서 그렇지'라는 말을 가장 싫어했던 정채봉은 다행히 공부를 곧잘 했고 지방 명문고에 진학했다. 그러나 일본의 아버지로부터 날아오던 학비가 어느날 갑자기 끊기고 그는 학교에 나갈 수 없게 되어상심에 빠져 들었다. 아버지와의 절연,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된 현실은 자존심 강한 사춘기 소년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됐다. 집에서 놀고 있는 제자를 안타까이 여긴 중학교 은사의 도움으로 학비를 전액 면제 받을 수 있는 '광양농고'에 들어간 정채봉은 '온실 관리'를 책임지게 됐다. 그러나, 그는 임업, 화훼 등 농업학교의 교과목이 체질에 맞지 않았고 급기야 온실의 연탄 난로를 꺼트려 관상식물이 얼어 죽게 만드는 '사고'를 치고 이내 학교 도서실의 당번 일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그를 창작의 길로 인도할 줄은 정채봉 스스로도 몰랐다. 도서실에서 세계의 고전을 두루 섭렵한 정채봉은 그 무렵 매일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하루하루의 일상과 자신이 관찰한 사물에 대해 적어 보내는 일이었다. 그 중 한 친구에게는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는데 정채봉 스스로 말하기를 그 때 쓴 수 백 통의 편지가 습작의 시작이었을 거라고 한다.
광양의 농업학교를 졸업한 정채봉은 재수 끝에 동국대 국문과에 진학했다. 1학기를 마치고 입대, 1971년 제대 후 돌아온 대학은 유신 반대 데모와 휴교령 속에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당시 정채봉은 현실 참여를 두고 갈등하는 문약한 지식인의 비애를 담은 글을 학교 신문에 실어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습작 시절을 거쳐 대학 3학년 때인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꽃다발'로 당 선의 영예를 안았다. 당시 정채봉은 소설과 동화 두 부문 모두에 응모를 했고 소설 또한 마지막 심사까지 올라갔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로 정채봉은 10년 가까이,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대학 졸업 후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업 전선'에 뛰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그에게 배고픔이 훤히 보이는 전업 동화작가의 길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학 문을 나서던 해 정채봉은 숙부가 경영하던 섬유회사에 취직했으나 3년 만에 부도가 나 실직자가 됐고, 1978년 선배의 소개로 들어가게 된 곳이 <샘터>였다. 게다가 동화로 신춘문예에 당선한 그에게 '동심'을 추구하는 <샘터>의 편집 방향은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1980년 '5월 광주'는 정채봉에게도 심각한 정신적인 공황을 가져다 주었다. 무력감과 함께 진실과 정의는 무엇인가 깊이 회의하던 그는 가족들과 함께 카톨릭에 귀의했다. 성장기 할머니 손을 잡고 승주 '선암사'에 다닌 후로 줄곧 정채봉의 정서적인 바탕은 불교적인 것이었다. 이후로 카톨릭 신앙은 불교와 함께 정채봉의 작품에 정신적인 배경이 된다.
<샘터>에서 기반을 닦은 정채봉에겐 풀리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 국문과에 진학했던 '작가지망생'의 꿈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그동안 띄엄띄엄 발표했던 동화를 모아서 <물에서 나온 새> 를 간행했는데 이 작품집으로 1983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1973년 신춘문예 당선 이후 10년 만에 다시 창작의 길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의 두번째 작품은 <오세암>. 금강산 건봉사 말사인 오세암에 전해 내려온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다섯 살 소년의 성불이야기를 써내려 간 이 동화는 지금까지도 동화의 소재와 주제를 확장한 것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이 작품으로 정채봉은 새싹 문학상을 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샘터>에 '생각하는 동화'라는 독특한 분야의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짧고 간결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는 이야기.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는 '성인동화'라는 전례없는 문학 용어를 만들어 냈다.
<멀리가는 향기>, <내 가슴 속 램프> 등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서점이나 가판에 선 채로 '생각하는 동화'를 읽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니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모두 일곱 권의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와 함께 성장 소설 <초승달과 밤배>로 정채봉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동화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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