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1.-목마(木馬)와 숙녀(淑女)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庭園)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히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2.<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시인. 강원도 인제 출생. 경성 제일 고보를 거쳐 평양의전 수료.
1945년, 마리서사(마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기림.오장환.김광균 등과 알게 되었고,김경린,김수영 등과 어울렸다.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경향신문에 근무했다.
1949년,김경린.임호권.박인환.양명식 등 5인의 합동 시집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을 발간하여
모더니즘의 기수로 각광을 받았다.
박인환은 1930년대 김기림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을 계승한
1950년대의 후기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후기 모더니즘의 형식적 새로움은
새로운 현실인식과 새로운 사회적 실천에서
불가피하게 태어난 것이 아닌,
현대 서 구 문학의 학습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따라서 그 관념이 사회적 기반을 결(缺)하고 있 다는 점에서
1930년대 모더니즘의 발전적 계승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으며,
그것은 1940년대 말기 의 명동 중심의 지적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박인환은 <후반기> 동인이었으며,
대표작으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