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시

소동파

사과나무 아래서 2007. 7. 6. 09:00

 

“만고를 한 번에 씻어내니 보통의 말들은 다 사라졌다!”  『소동파사선 역주 蘇東坡詞選 譯註』

 

글|조규백_번역가, 제주관광대 중국어통역과 교수. 1957년생.
저서 『중국의 문호 소동파』, 역서 『역주 소동파산문선』 『천자문주해(前)』 등

 

                             


 

1.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본명이 소식(蘇軾)이며, 부친 소순(蘇洵), 아우 소철(蘇轍)과 더불어 ‘삼소 三蘇'라 불린다. 그는 중국 북송시대의 정치가로서도 유명하지만, 천재적 자유정신과 재주, 꾸준한 노력,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는 정신으로 명작을 창작해 낸 대문호로서 더욱 알려져있다.
자유정신과 이성적 사유, 그리고 개성을 중시했던 북송의 문화와 문학정신, 시대정신이 그에게 역력히 구현되어 있다. 문학의 경우, 그는 시, 사(詞), 산문, 부(賦) 등 여러 장르에 모두 뛰어나 각기 시대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소동파의 매력은 뜨거운 가슴으로 자연을 사랑하였고, 선배를 존경하고 후학들을 발탁하였으며, 평생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자신의 지조를 지킬 수 있었던 인간미에 있다. 주관이 강하면서도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포용력과 인품은 역경을 창조의 계기로 전환시키는 에너지가 되었다.
소동파는 광맥이 크고 넓은 문인이다. 평생 연구해도 캐내야 할 광구가 무한하여 캐기만 하면 계속 광석이 쏟아져 나온다. 그는 지적 호기심과 탐구욕이 왕성해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좋아했으며 경학(經學), 고고학, 요리법 창안, 술 제조, 차(茶) 품평, 서예, 그림, 그리고 예술 감식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유가도로 자임하고 있으나, 선승(禪僧)들과의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대화는 많은 일화를 만들어 냈고, 도교의 도사들과도 깊은 교류를 하였다. 이처럼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발군의 기량을 드러낸 소동파는 21세기에 걸맞은 문화적 거인으로서 반드시 새로운 조명과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2.
소동파의 생애는 크게 소년기 및 사환전기(仕宦前期), 제1차 폄적기, 사환후기(仕宦後期), 제2차 폄적기 및 북귀(北歸) 등으로 4분할 수 있다.
소년기와, 사환전기(26~44세)는 동파가 가정과 사회의 훈도(薰陶)를 받으며 ‘독만권서 讀萬卷書'하여 그의 천재성을 함양한 후 과거에 합격, 관직 세계에 진입하여 더 큰 세계를 향해 가면서 위대한 시인이 될 자질을 기르고, 발양(發揚)한 시기이다.
26세(嘉祐6년, 1061)에 첫 부임한 봉상첨판(鳳翔簽判)시절부터 오대시안(烏臺詩案)으로 인해 황주(黃州)로 폄적되기 이전(元豊2년, 1079년, 44세)의 기간을 사환전기라 부른다. 이 기간은 동파가 함양(涵養)해 온 능력을 여러 지방관과 잠시 동안 중앙관을 거치면서 ‘행만리로 行萬里路'의 직접경험을 통해 현실에 응용한 시기이다. 이 시절 왕안석(王安石)은 신법(新法)을 시행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였다. 이 신법에는 현실을 직시한 긍정적인 발상이 적지 않았으나, 실제의 실행과정에서 지나치게 성급하고 과격하여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신법을 반대하는 관료, 학자와 신법을 옹호하는 관료 사이에 틈이 더욱 벌어졌다. 전자는 구법당(舊法黨), 후자는 신법당(新法黨)이라고 불렸는데, 소동파는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구법당에 속했다.
동파는 정치적 풍파에 염증을 느끼자 지방으로 전출을 자청하여 풍광이 아름다운 항주통판(杭州通判, 36~39세)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후 사(詞) 창작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이어 밀주지주(密州知州, 39~41세)로 옮겼다 다시 서주지주(徐州知州)가 되었다. 서주(徐州) 시기(42~44세) 사(詞)에는 농촌 풍정에 관한 것들이 이채를 띠고 있다. 이어 호주지주(湖州知州, 44세)가 되었다가, 신법을 풍자했다고 평가되는 시들로 인해서 반대파에 의해 오대시안(烏臺詩案)이라 불리는 필화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황주(黃州)에 유배되게 된다. 황주 유배시기(45~49세)는 농후한 서정과 수준높은 예술성을 보여주어 그의 사를 꽃피운 시기로 여겨진다. 이는 그의 생애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데, 이 곳에서 과거의 나날들에 대한 깊은 반성과 침잠으로 인생에 대한 거시적 안목을 키워 나갔다. 인생의 쓴맛을 깊이 체득하고 그것을 초탈하고자 노력함으로써 불후의 문학을 탄생시켰던 기간이다.
적거(謫居)라는 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때로는 산수를 소요하며, 문학창작으로 극복하여 이 시기에 그의 문학이 꽃 피었다고 할 정도로 전후 『적벽부 赤壁賦』, 『염노교 念奴嬌』(大江東去) 등을 위시한 많은 걸작들을 남겼다. 그는 생활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광달(曠達)한 정취를 즐기기도 하였다. 아울러 도연명(陶淵明)의 행적과 인품을 흠모하였으며, 그의 시세계에도 경도되었다.
이어서 사환후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 8년(50~58세)은 연호(年號)에 따라 ‘원우시기 元祐時期'라고도 불린다. 그는 한림학사(翰林學士), 항주지주(杭州知州), 영주지주(潁州知州), 양주지주(揚州知州) 등 중앙관과 지방관을 두루 거치고 나서 비록 단기간이지만 병부상서(兵部尙書), 예부상서(禮部尙書) 등 최고의 관직을 누린다.
이후 단명전학사겸한림시독학사(端明殿學士兼翰林侍讀學士), 정주지주(定州知州)가 되었다. 이즈음 선인태황태후(宣仁太皇太后: 高太后)의 죽음으로 철종(哲宗)이 친정을 하게 되자 신법을 부활시켰고 정권은 다시 신법당의 손에 들어갔다. 이에 구법당 관료들은 탄핵이나 추방을 당하고, 동파도 이후 몇 년간 폄적기간을 보내게 된다.
혜주(惠州)에서 2년 남짓 적거생활을 한 다음, 62세에 경주별가(瓊州別駕), 창화군안치(昌化軍安置)의 명령을 받았다. 이에 셋째 아들 과(過)만 데리고 바다를 건넜다. 7월 해남도(海南島)의 담주(州)에 도착하여 다시 3년의 적거생활을 하게 된다.
정계는 또다시 변화를 거듭하여 65세(元符3年)에 철종이 붕어하고 휘종(徽宗)이 즉위하자, 신종(神宗)의 처(妻) 상씨(尙氏)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신구양파를 모두 등용 중용의 정치를 행한다는 방침에 의해 소동파는 사면되어 해남도를 떠나 북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66세에 북귀(北歸)도중 그가 예전부터 은거하고자 소망했던 상주(常州)에 도착, 병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3.
사(詞)는 시가의 한 분야로서 송대(宋代)에 유행했던 노래의 가사이다. 요즘의 유행가 가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음악은 사라지고 가사만 남은 셈이다. 그의 사에는 유람, 회고, 송별, 증답(贈答), 설리(說理), 담선(談禪), 애국사상, 농촌생활, 상도(傷悼) 등 다양한 제재가 들어있다. 유희재는 “동파 사는 두보(杜甫)의 시와 유사하니 그 들어갈 수 없는 뜻이 없고, 말할 수 없는 일이 없다. 그 호방의 지극함 같은 것은 때때로 이백(李白)과 가깝다”고 했고 청말의 진정작(陳廷)은 “사람들이 동파의 고시(古詩)와 고문(古文)이 백대(百代)에 뛰어남은 알고 있으나 동파의 사가 시문보다 더욱 뛰어난 것은 알지 못하고 있다. 구품(九品)으로서 시문을 논한 예에 따르면 동파의 시와 문은 상품(上品)에 나열된다해도 상(上) 중의 중(中)이나 하(下)에 불과하다. 사의 경우는 거의 상(上)의 상(上)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원호문(元好問)은 동파 사에 대해, “만고를 한 번에 씻어내니 보통의 말들은 다 사라졌다”라고 극찬했다.
그의 사는 예술성이나 서정성이 농후하고 우아미를 지닌 사대부화를 완성시켜 그 문학적 가치가 높다. 동시에 그는 집구사(集句詞), 회문사(回文詞) 등 다양한 사체를 개척하였다. 특히 동파의 사는 우리 고려 시대 문인들의 사(詞)나 당악(唐樂)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하다.

 

-출처  대산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