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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고향> 성악가 엄정행 (월간조선)

사과나무 아래서 2007. 11. 19. 18:08
<작가의 고향> 성악가 엄정행 (월간조선)



작가의 고향

경남 양산

嚴正行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


외딴집에서 보낸 유년시절

내가 가진 최초의 기억은 어머니(鄭貞叔) 등에서 바라보았던 아버지(嚴英燮)의 모습이다. 그때 나는 아마도 태어난지 2년이 채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머리에 띠를 두르고 트럭에 실려서 어디론가 떠나셨다.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대동아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을 때인 1943년 2월12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전쟁으로 끌려가기 위해 트럭을 타셨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셨다. 웬일인지 그때 사연을 아버지에게 물어보지 않아 끝내 그 일을 자세히 알진 못한다. 다만 그때부터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아버지를 자주 만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징용문제 때문이었는지 우리 가족은 경남 양산에서도 골짜기에 속하는 소토리의 외가댁에 머물게 되었다. 소토리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곳에 위치한 외가댁은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집이었다. 외가댁은 상당히 재력가였는데 외할아버지가 단명하셔서 그 집이 텅 비어 있었다.

집이 꽤 높은 위치에 있었는데 아랫동네에 점점이 보이는 집들과 들판을 바라보는 일로 소일하곤 했다. 누나와 함께 마당에서 놀다가 바라보는 아랫동네는 언제까지든 우리들에게 다가오지 않을 세상처럼 보였다.

내가 국민학교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그 집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보성고보를 졸업하시고 군청에 근무하시다가 해방이 되면서 양산중학교 음악선생으로 재직하게 되셨다. 우리가족은 양산중학교 관사에 살게 되었다.

국민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희망고개라는 둑방길을 넘어 다녀야 했다. 강물이 흐르는 옆으로 난 둑방길을 걸으면 아름다운 경치 때문에 늘 기분이 좋았다. 나는 외딴집에서 내려와서 처음으로 친구들과 사귀게 되었다. 산속에 지내다가 번화한 읍내에 사는 것이 한동안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곧 어울릴 수 있었다.

2학년 때 내게 시련이 닥쳐왔다. 6·25로 인하여 양산에도 군인들이 많았다. 학교 사택인 우리집 옆에 군인들이 머물게 되었다. 나는 군인들과 금방 친해져 군인들을 따라다녔다. 전쟁의 두려움 같은 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며 총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느날 부엌에 앉아 불을 쬐고 있는데 불을 지피던 사병이 생나무가 잘 타지 않자 생각없이 불꽃 위에다 휘발유를 끼얹었다. 갑자기 솟아오른 불길이 내 옷에 옮겨 붙었다. 나는 놀라서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는 쌀을 씻고 계시다가 엉겁결에 그 물을 내게 끼얹었는데 결국 심한 화상을 입고 말았다.

처음에 군인들이 치료를 하다가 잘되지 않아 병원으로 옮겼는데 너무 상처가 심해 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치료를 계속해 달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매일 무거운 나를 업고 희망고개를 오르내리셨다. 나는 병원가는 일이 너무나 두려워 등에 업혀 내내 떨었다. 고름이 뒤엉긴 붕대를 풀 수가 없어 아예 붕대를 가위로 잘라냈는데 피와 고름이 엉겨붙은 붕대를 풀 때면 나는 혼절하고 말았다. 그렇게 병원에 갔다오면 나는 내내 방에서 누워 지낼 수밖에 없었다.

풍금을 치며 노래하던 아버지

어머니는 벚꽃이 피고 지는 줄도 모르고 2km나 되는 길을 일년동안 나를 업어 나르셨고 나는 병원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1년동안 방안에서 지냈다. 방에서 지내는 동안 나의 유일한 벗은 축음기였다. 집에는 아버지가 사두신 SP판이 상당히 많았다. 나는 하루종일 음악을 들었다. 그중에서도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을 즐겨 들어 전곡을 암기할 정도였다.

음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던 시절에 나는 아주 수준 높은 음악을 하루종일 접하며 살았던 셈이다. 당시에 들었던 음악이 잠재의식 속에서 나의 음악성을 일깨워 주었을까?

아버지는 음악을 전공하셨지만 특별히 음악을 하라고 강요하신 적은 없다. 관사에서 살 때 아버지가 일찍 오시지 않으면 누나와 학교로 아버지를 찾으러 가곤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풍금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아버지가 노래부르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 우리가 가면 그저 아무 말씀 없이 풍금 뚜껑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 나셨다.

나는 1년을 앓아 누웠다가 겨우 자리를 추스르고 일어나 학교에 갔다. 1년이나 다리를 쓰지 않아 다리가 펴지지 않았다. 6개월 동안 목팔을 짚고 학교에 다녔다. 부목을 대고 매일 다리펴는 연습을 해야 했다. 6개월간 고생한 끝에 다리가 오그라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쪽 발이 퉁퉁 부어올라 늘 문수가 다른 짝짝이 신발을 신고 다녔다. 걷는 데는 지장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4학년 때부터는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었다. 4학년 때 학교를 증축하는데 우리들이 벽돌 나르는 일을 했다. 나도 앞장서서 벽돌을 나르면서 내 다리가 다 낫게 된 것을 마음 속으로 감사했다.

국민학교 때 학예회에 나가 노래를 부른 적이 있긴 하지만 특별히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는 아니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음악선생님이 여전히 부어있는 내 발을 보시더니 운동을 하라고 권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배구선수가 되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건빵공장을 내셨다. 원래 증조할아버지 때 만석꿈으로 대단한 부자였다. 할아버지 댁 대문이 워낙 커 한번 문을 열면 삐걱이는 소리로 온동네가 요란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6형제 뒷바라지와 전쟁통에 재산이 다 없어지자 아버지는 집안을 부흥시키기 위해 공장을 차리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장은 2년 정도 유지하다가 문을 닫고 말았다.

아버지가 공장을 하는 동안 집안 살림이 어려워 어머니가 취직을 하셨다. 동덕고보를 졸업하신 어머니는 양산군청의 여성담당 직원으로 들어간 뒤 그후에 대한부인회에서도 일을 하셨다. 일을 갖고 활동하시는 어머니를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아버지는 건빵공장이 망하자 동래고등학교 교사로 들어가셨다. 나는 당시 배구에 두각을 나타내 동래고등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배구선수에서 음대생으로

고등학교 때 내 노래실력을 인정하신 분이 계셨다. 국어 담당이신 윤영춘 선생님은 수업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내게 노래를 시키셨다. 나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져 감정을 잡아가며 최갑석의 '삼팔선의 봄'을 소리 높여 불렀다. 그때까지도 내가 앞으로 노래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배구에서 성악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입시를 한달 앞둔 시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구시합이 9인조로 이루어졌는데 갑자기 새로운 경기방식인 6인조 국제식 배구로 바뀌게 되었다. 신장 1m74cm로는 장신이 유리한 6인조 배구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남들보다 뛰어난 선수도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체육대학으로 진학한다는 것은 장래성이 없는 일이었다. 진학문제를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아버지가 어느날 나를 부르셨다.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음대에 진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때까지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긴했지만 전문적인 공부도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난데없이 음대를 권하신 것이다. 동래고등학교 2학년 대 영남예술제에서 성악부 특상을 받은 것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신 것 같았다.

나는 밤새 곰곰 생각해 본 후 일단 음대에 가기로 결정했다. 비전없는 체육대학에 가는 것 보단 낫겠지하는 생각에서였다. 부랴부랴 아버지의 친구인 부산고등학교 김점득 선생님(현 음악평론가)께 사사를 받았다.

당시에 경희대 체대가 유명하여 마음을 경희대로 정하고 있었던 터라 학교를 선택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입시준비기간이 짧아 떨어질 줄 알았는데 다행히 합격이 되었다. 당시도 요즘 못지않게 음대 입시가 치열했다.

입학을 하고보니 동급생들은 보통 1~2년은 레슨을 받은 데다 음악론 공부를 철저히 하고 온 상태였다. 게다가 이탈리아 칸초네 몇 곡 정도는 기본으로 할 줄 알았다. 나는 아무 기초도 없는데다 외국어를 할 줄 모르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뒤쳐졌다는 생각이 들자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게다가 절실히 원해서 들어온 것도 아니어서 나는 겉돌기 시작했다. 1학년 내내 체육대학 근처를 어슬렁거리면서 보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자 도저히 학교를 다니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낙향을 하려고 몇 번이나 짐을 쌌다가 풀곤 했다. 그래도 짐을 싸지 않고 버틴 것은 이상춘 교수님이 내게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초창기 테너 가수였던 이상춘 교수님은 나에게 "너는 운동을 해서 몸도 좋고 소리에 힘이 있으니 악물고 해보아라. 틀림없이 대성 할 수 있을 게다"라고 격려해 주셨다.

홍준표 선생님과의 만남

이교수님의 말씀 때문에 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등록을 했다가 홍준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우연히 선생님의 연구실을 찾아가게 되었다. 선생님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내게 다짜고짜 잘하는 곡을 불러보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갑작스런 지시에 당황했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태리 가곡 '거짓말'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선생님은 눈을 감고 가만히 계셨다. 선생님이 나의 불성실을 꾸짖으시려는 게 틀림없다고 지레짐작을 하면서 머쓱하게 서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예상과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자네는 목소리가 정말 좋군. 그런데다 운동으로 다져진 체력이 뒷받침 해 주니 얼마나 든든한가. 한번 최고에 도전해 보게나"

선생님의 말씀에 방황만 하고 있는 내게 한줄기 빛을 던진 것이다. 막막하기만 하던 기나긴 꿈에서 막 깨어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나에게도 이런 잠재력이 있다니, 한번 열심히 해보자'

그때부터 피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우선 외국어대학 학생들이 하숙하는 집으로 방을 옮겼다.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전공하는 학생들과 함께 어울려 발음공부부터 차근차근 해 나갔다.
학교에 연습용 피아노가 적어서 저학년인 내게는 웬만해서 차례가 오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새벽에 학교에 가 선배들이 연습을 하러 오기 전에 먼저 연습을 했다.

지금 부산여대 재직중인 임종길 교수를 만난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임형은 대학 1년 선배로 나와 같이 하숙을 했는데 매일 저녁 밥상머리에 앉아 나에게 그날 연습한 노래를 부르게 했다. 한번 틀릴 때마다 내 그릇의 밥을 한숟가락씩 덜어갔다. 처음 얼마 동안은 하도 많이 틀려서 밥그릇에 밥알 하나 남아 있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도리없이 쪼르륵 거리는 배를 움켜쥔 채 새벽을 기다려야 했다.

열성적으로 음악 공부에 몰두하자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배구선수가 못되어 선택한 길이 아니라 성악이 진정 나의 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도 원래 보성고보 시절 농구선수였다가 음악교사로 변신을 시도한 셈이다. 그때부터 방학 때 고향에도 내려가지 않고 연습에 몰두했다. 그 결과 3학년 때 실기 점수는 A학점이었다. 졸업할 때는 각 학교에서 한 명만 출전할 수 있는 조선일보 신인음악회에 내가 추천되었다.


악기상과 양장점 운영

그러나 신인음악회에 나가고 대학원에 들어갔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가난했고 음악은 신통치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내일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두 학기를 다니고 바로 휴학을 했다. 예그린 합창단에 입단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조금씩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아내(李美 子)도 만나게 되었다. 아내는 서울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한 소프라노였다. 처음 보는 순간 호감을 느낀 나는 저돌적으로 접근하여 결혼에 이르게 되엇다. 결혼 후 자신을 길을 포기하고 내조를 해준 아내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결혼을 하자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가난해도 혼자 견디면 그만이었는데 이제는 그럴 입장이 아니었다. 유학을 가서 좀더 음악적인 영역을 넓혀야 하는 시점에 가장이 된 나는 우선 살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나에게는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교수·성악가'라는 호칭이 늘 따라 다닌다. 유학을 가지 못한 건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집안에 아들이 하나라는 것도 장애요인이 되었다. 외아들이어서 행여 먼 길 나갔다 잘못되면 안된다는 집안 어른들의 걱정때문이었다. 그리고 결혼도 발목을 잡은 한가지 이유가 된다.

유학을 떠나 더 공부를 하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이 유학을 떠날 것이 아니라 선생을 초빙해 와서 국내에서 많은 사람이 배우는 방식을 견지해야 한다. 또한 국내에 훌륭한 선생이 많기 때문에 구태여 유학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던 해인 1968년 명동 국립예술극장에서 제1회 독창회를 열었다. 동문들과 함께 양동이에 풀을 담아 포스터를 서울시내 곳곳에 붙였다. 8백 석의 객석이 가득차고 독창회는 성황리에 끝났지만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당시 너무 조급했다. 평생 걸어도 모를 성악의 길이 한번의 연주회로 위치가 달라지길 기대했건만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하자 실망하고 말았다. 연주회를 하고나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서 무작정 노래만 부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이가 태어나자 우선 생활이 급했다. 신세계 백화점에서 악기상도 하고 아내와 함께 양장점도 해보고 커피숍도 운영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5년이었다.

유학도 다녀오지 않은데다 5년이나 성악의 길에서 떠나 있었으니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음이 분명했다. 나이는 이미 서른이었다.

화려하게 피어난 목련화

72년 어느날, MBC FM에서 장일남 선생이 제작한 우리 가곡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라디오를 통해 우리 가곡을 듣자 한동안 떠나있던 성악에의 열정이 되살아났다. 나는 장일남 선생을 찾아가 다짜고짜 녹음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성의가 가상해 보였던지 장선생이 허락을 해주어 12곡을 녹음하게 되었다. 이왕 녹음했으니 그것을 레코드로 만들고 싶었다. 나는 녹음 테이프를 들고 서라벌 레코드사를 찾았다.
"제가 부른 가곡을 스테레오 음악으로 내고 싶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곡은 이인범씨의 지글거리는 SP판이 고작이었다. 가곡에 대한 인식도 낮은 편이었다. 서라벌레코드사에서는 반신반의하면서 한번 제작해 보자고 했다. 단 작곡가와 작사가의 허락을 받아오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원작 사용승인을 받기 위해 꼬박 석달을 돌아다녔다. 석달동안 잊고 있었던 내가 갑자기 도장을 받아서 나타나자 레코드사에서 깜짝 놀랐다. 당시 레코드 취입하는데 드는 비용이 42만원이었다. 지금 대성음반 사장으로 계시는 이흥주씨가 성의가 가상하였던지 17만원에 출반해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된 레코드는 때마침 붐을 이루던 FM방송과 텔레비전 전파를 자주 타게 되었다. 그때는 방송국에 음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터라 매일 방송국의 턴테이블에서 내가 부른 가곡이 신나게 돌아갔다. 전국적으로 엄정행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첫 창작집을 품에 안고 돌아와 아버지가 마련해 준 전축에다 걸어놓고 밤새도록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시간이 편린들이 노래의 갈피마다 고여 있었다.

74년부터 경희대학교와 청주여자사범대학에 강사로 나가기 시작하면서 대학강단에 서게 되었다. 76년부터는 경희대학교 전임이 되었고 올 7월에는 음악대학 학장을 맡게 되었다.

내가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역시 '목련화'의 덕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목련화'는 金東振 선생이 경희대 25주년을 기념하여 '경희 4 반세기 칸타타' 제2악장 첫머리의 삽입곡으로 작곡한 것이다. 노랫말은 경희학원 설립자인 조영식 박사가 지었다. '목련화'의 노랫말을 보고 대뜸 내가 불러야겠다는 욕심을 가졌다.

목련화를 부를 때 내게 '60번'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목련화'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작곡가이신 김동진 선생님을 매일 찾아갔다. 선생님은 이 부분은 부드럽게, 이 부분은 힘있게 부르라고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 60번이나 고쳐 불렀다고 해서 그런 별명이 생긴 것이다.

한송이를 피우기 위해 그렇게 고생한 끝에 피어난 '목련화'는 너무 큰 사랑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클래식 앨범은 회사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형식적으로 발매하는 정도였는데 '목련화'는 주문량이 밀려들어 밤샘 작업을 해야 할 정도였다. 곳곳에서 연주회 요청이 쇄도했다.

5년간의 외도를 끝내고 음악의 길로 돌아와 레코드를 낸 이후 나느 정말로 흡족한 음악의 길을 걸어왔다. 그동안 53회의 독창회를 열었으며 22종의 레코드를 냈다. 그리고 1년 평균90회가 넘는 공연을 해왔으니 어림잡아 나흘에 한번 꼴로 무대에 선 셈이다. 방방곡곡에서 나를 부르기만 하면 달려갔다. 탄광촌이나 어촌, 지방의 작은 무대도 마다않고 내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분들만 있으면 달려갔다. 지난 6월에도 지방 연주회를 22차례나 다녀왔고 7월에는 미주지역에서 4차례 연주회를 열었다.

이렇게 많이 다니지만 특별히 건강을 위해 애쓰거나 목을 보호하는 비결은 없다. 배구를 하면서 다진 건강이 무엇보다 큰 재산이다.

연주회를 많이 다니지만 나는 성악가이기 이전에 교육자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어쩌면 목을 혹사하고 있다고 해서 레슨을 게을리하진 않는다. 학생들을 일대일로 가르치면서 잘못된 부분은 반드시 實演을 한다.
이제 경제적인 면도 많이 좋아졌으니 훌륭한 성악가가 많이 배출될 수 있을 것이고, 내가 그런 제자들에게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버지는 예전에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제자를 각별히 사랑하셨다. 형편이 어려운 제자에게는 쌀자루를 가져다 주시기도 하셨다. 우리와는 별로 대화가 없으셨지만 제자들에게 늘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많은 얘기를 나누셨다.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나도 제자들에게 뭔가 나눠줄 수 있는 스승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우리 가곡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일이다. 우리 가곡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집이 아직 없다. 우리 음악 역사의 정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자료를 모으고 있는 중이다.

딸 윤아(소프라노·25세)도 성악의 길을 가고 있다. 경희대 성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지금 미국 유학길을 떠났다. 나는 윤아가 훌륭한 성악가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성악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단란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나 그리고 딸이 이어나가는 家系가 참으로 소중하다.

고향이 가르쳐 준 인내

앞으로 내가 노래를 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될까. 한 5년정도 지나면 체력이 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청중의 귀를 괴롭힌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라도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대에 서 왔다.

암담했던 시절 끝에 가곡 레코드 취입, 목련화의 화련한 탄생, 그리고 내게 주어졌던 무대와 강단. 나는 그 무대와 강단에 여전히 서 있다.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를 때면 양산의 소토리 외가댁에서 내려다보던 마을이 떠오른다. 그리고 방안에 누워 SP판을 들으며 고통과 싸웠던 일들도.

고통과 인내를 가르쳐준 고향이 있었다는 생각으로 나는 고향과 음악을 늘 가슴에 안고 산다. 추운 겨울 해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처럼 순결하고 향기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

<정리 : 李根美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