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

사랑은 변한다ㅡ봄날은 간다..

사과나무 아래서 2009. 3. 30. 09:11

 

 -반짝반짝 연애통신 다음지부에서 퍼 온 글입니다

 

  이 영화는 다섯 번 정도 본 것 같다. 가장 최근에는 글을 쓰기 위해 바로 어제 보았는데 참 이상했다. 네 번째 까지는 절대로 이해되지 않던 여자 은수가 이제는 왜 그랬는지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은수는 라면을 먹자고, 자고 가라고 먼저 유혹해놓고는 어느 날부터인가 아무 이유도 없이 매정하게 상우를 버린다. 자신이 연락할 때까지 먼저 연락하지 말고 지내자고 하더니 문득 상우의 작업실로 찾아가서 함께 밤을 보내고, 그 밤에 말한다. ‘우리 한 달만 떨어져 있자. 그럴 수 있지?’ 당연히 그럴 수 없었던 상우는 술에 취해 은수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이별 통보를 받는다. ‘우리 헤어져’ 상우는 말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를 네 번 봤을 때까지 내가 본 스토리는 그랬다. 영화 속의 은수는 그 해사한 얼굴과 달리 너무 나쁜 여자였다. 일방적인 통보로 헤어지자고 말 한 다음, 상우야 자신을 잊기 위해 힘이 들건 말건 은수는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초대된 평론가와 새로 연애를 하고, 운전을 배워 연두색 자동차도 산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다. 정말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상우 대신 내가 그녀를 붙잡아 앉히고 묻고 싶었다. 하나 더 보태자면 ‘사랑이 장난이냐’ 고도 묻고 싶었다. 

 

 

  이 영화는 내내 은수가 아닌 상우의 입장에서 진행이 된다. 은수가 헤어지자고 말 한 이유 보다는, 별 이유도 없이 헤어지자고 말한 은수 때문에 상우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러니 관객은 당연히 상우의 편에 서게 된다. 상우의 시선에서 보자면 은수는 나쁜 여자다. 사귀자고 먼저 꼬리 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를 버린다. 그들이 보낸 행복한 시간은 그야말로 봄날처럼 짧았다. 상우가 얼마나 착한데, 상우가 얼마나 순수한데 그걸 미처 다 알기도 전에 은수는 상우를 버린다. 그리고는 상우에 비해 한참이나 닳은 듯 보이는 느끼한 외모의 평론가에게 그 사랑을 옮겨 버린다.

 

허나 내가 앞서 말했다시피 이 영화를 다시 보니 내가 놓친 부분들이 뭔지 눈에 보였다. 그것은 답답함이었다. 상우는 참 답답한 남자였다. 농담도 잘 못 할뿐더러 남이 하는 농담을 되받아 쳐주지도 못한다. 극중 은수는 상우에게 했던 말을 평론가에게도 똑같이 한다. 소화기 사용법을 아느냐고 말 했을 때, 상우는 은수가 소화기 사용법을 말 할 때까지 그저 웃으며 바라 볼 뿐이다. 하지만 평론가는 비록 유치할망정 ‘그건 몰라도 분위기 전환법은 아는데, 맥주 한잔 하러 갈래요?’ 라고 말한다. 아마 그날 밤, 은수는 그와 취하도록 마시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내게 순수는 너무 버겁다고...


은수는 외로웠을 것이다. 이혼을 하고 나서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그냥 좀 외롭지 않게 누군가가 옆에 있어 줬으면 했을 것이다. 그때 마침 만만해 보이고 착한 남자 상우가 나타났다. 하지만 상우는 은수가 원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라면을 먹자는 얘기, 자고 갈래요 라는 얘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소년 같은 남자였다. 만약 그 말을 평론가에게 했더라면 그는 어땠을까? 정말 라면만 먹고 잠만 잤을까? 비록 아침에 일어나서 상우는 뒤늦은 스킨십을 시도하지만, 그녀는 이미 그 전날 밤에 상우와 함께 잘 마음을 먹었던 여자다. 하지만 상우는 자기 혼자 침대에서 곯아 떨어졌다. 여자와 집에서 밤을 보내면서 그녀를 가만히 두는 남자. 그는 소녀에게는 적당한 남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은수처럼 이미 여자가 된지 한참이나 지난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둘의 사랑은 이미 끝이 보이는 사랑이었다. 상우는 자신의 순수와 사랑만 생각한다. 그녀에게 한 번의 이혼 경험이 있거나 말거나 아버지가 사귀는 여자를 보고 싶다고 한다며 은근히 그녀에게 둘의 사이를 공식화 시킬 것을 요구한다. 물론 상우의 입장에서는 너무 사랑하니까. 그래서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날도 잡고 영원히 함께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상우의 생각일 뿐이다. 은수는 이미 충분히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열게 하는 건 버겁도록 순수한 상우의 마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그녀는 순수와 열정을 경험했을 것이고 그게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배웠을 테니 말이다.

 

상우는 헤어지자는 은수의 말에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묻는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상우에게 되묻고 싶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지 않느냐고. 하물며 사람도 변하는데 사랑, 그까짓 게 뭐라고 영원불멸 하겠느냐고... 

 

간혹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보면 테이블이며 벽에 낙서들을 보게 된다. 찬찬히 훑어보다가 보면 주로 ‘누구와 누구의 사랑 영원히 변치 않길’ 등의 내용이 가장 많다. 왜 사람들은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그토록 바라는 것일까? 그건 사랑이 변하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것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지도, 또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때 이동통신사 후발 주자가 광고를 하면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었다. 맞다, 사랑은 움직인다. 움직일 뿐 아니라 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끝이 나기도 한다. 세상에 영원히 지금처럼 지속되는 사랑 같은 건 없다. 다만 그러고 싶다는 꿈이 있을 뿐이다.

 

변하지 않는 쪽에서 보면, 이미 변해버린 사람은 야속하기 그지없다. 나는 아직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서있는데 왜 너는 다른 곳에 있는가? 왜 너는 내가 바라보는 그 곳을 함께 바라보며 기뻐하지 않는가?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랑만 사랑인 것은 아니다. 추억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언가가 끝났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고 영원토록 계속 된다면 추억 같은 건 없다. 언제나 현재가 있을 뿐이다.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끝 장면이다. 종이에 베인 손가락을, 그 예전 상우가 가르쳐 준 것처럼 높이 올려 흔들던 은수는 다시 상우에게 연락을 한다. 아마 그녀는 상우가 받아주기만 한다면 또 다시 상우의 곁에서 잠시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상우는 이미 충분하게 아팠으므로, 그녀를 다시 받아주지 않는다. 아픈 만큼 성숙해졌다 의 본보기가 있다면 아마 그때의 상우가 아닐까? 상우는 버거울 만큼 순수했던 소년에서 한 남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은수가 던지는 잠깐의 봄날 같은 사랑이 아닌, 자신의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일상을 함께 하는 동반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랑을 똑같이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 끝 지점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한쪽은 먼저 끝이 나고 다른 한 쪽은, 때로는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상대방 때문에 끝 낼 수밖에 없다. 참으로 냉정한 일이지만. 나 아닌 다른 쪽의 사랑이 끝이 난다면 내 사랑도 끝이 나야 한다. 왜냐면 혼자 하는 건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진실 되고 눈물겨운 사랑이라 할지라도 이미 끝난 상대에게 똑같이 그걸 강요할 수는 없다. 아니, 강요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을 거둬들여야 한다. 내가 사랑하니까, 내 사랑은 영원해야 한다고 생각되겠지만 그 순간부터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미련이 되어버린다.

 

한가지. 먼저 사랑이 끝난 쪽에게 당부를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제발 이지 끝나지 않은 사람을 헤깔리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단지 심심하고 조금 외롭다고 예전의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하는 나쁜 일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그의 사랑마저도 모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아직 나를 사랑하는 게 뻔한 사람에게 ‘그냥 해봤어’ 라며 전화를 거는 건 잔인한 짓이다. 다시 돌아가서 사랑해주지 않을 거라면, 그의 사랑이 끝날 때까지 함께 있어주지 못한다면 뒤돌아보면 안 된다. 그가 아무리 안 되어 보인다고 해도, 지금 당신이 잠깐 외롭다고 해도, 그 사랑을 정리할 몫은 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게 사랑이 먼저 끝난 자가 아직 사랑하는 자에게 갖추어야 할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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