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申東曄,1930.8.18 ~ 1969.4.7)
한국의 시인
1.시인의 생애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2대 독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과묵한 성품과 총명함으로 부친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그러나 어린 신동엽의 마음에는 항상 한 구석에 알 수 없는 울분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그의 정신세계에 근원적 영향을 끼친 성장 배경이 가로 놓여 있다.
그의 고향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금강은 수탈의 물줄기이다. 내륙에서 서해로 이어지는 금강의 길은 예로부터 수도 서울로 상납해 가는 물자의 통로였다. 항상 권력의 횡포에 시달렸던 농민들의 한이 함께 흐르는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동엽은 이러한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자랐다. 영특했던 외아들의 학업을 지원하기가 너무나 벅찼던 가난한 농가에서 자란 까닭에 항상 역사 속에서 수탈받는 역사적 소외 계층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아직도 부여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는 마지막 싸움에 나가기 전 개인적 미련을 털끝만큼도 남기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가족의 목을 베었다는 충신 계백의 한 맺힌 혼이 깃들인 황산벌을 바라보면서 신동엽은 고향에 맺힌 왜곡된 역사의 흐름을 일찍부터 감지할 수 있었다. 종종 유물이 발견될 정도로 보존된 보여의 고집,개발의 흐름을 거부한 채 고도(古都)부여의 넋을 보존하려고 하는 부여 사람들의 강직한 자존심 또한 체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인 백제 유민 아사달,아사녀의 모습은 그의 백제 예술혼에 대한 경배다. 또한 이는 신라의 권력에 의해 희생된 고귀한 사랑을 통해서 당나라라는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한 신라에 대한 비판과 백제의 역사적 한을 표현하려는 그의 의지의 발현체인 것이다. 그를 죽음으로 이끈 간질환의 원인이 된 혹독한 전쟁체험과 4.19혁명의 실패라는 쓰라린 경험은 그에게 역사를 바로보는 시각을 보다 예각화시킨다.
두 개의 신동엽 평전에는 이 전쟁 체험을 통해서 신동엽이 비로소 '민족'이라는 개념에 천착하기 시작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크로포크킨 등의 무정부주의라든가 영미 주지주의라든가 추상적인 관념적 코스모폴리터니즘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이 땅의 현실적 모순을 규명할 수 있는 사상을 찾아 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젊은 인테리들이 전쟁 체험을 통해 실존주의 등의 사상에 내재된 세계사적 동시성을 추구했던 데 비하면 독특한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을 통해서 코스모폴리터니즘의 허구성을 극명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이전에 체득하고 있었던 한학적 소양과 사학도로서의 면모,그리고 고향 부여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과 혁명의 체험은 우리의 현실을 규명할 수 있는 것은 서구 철학이 아니라 바로 동양 전통철학 이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한 계기였다. 한학과 사학이라는 그의 학문적 탐구 성향은 그가 문학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기교보다는 문학정신의 기반이 되는 철학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
어려서부터 문학 소년이었던 그는 자신이 소유한 독특한 사상적 체계를 문학을 통해서 형상화 하시 시작하였는데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연작시「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데뷔작은 그 첫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1969년 작고하기 까지 일관된 시세계를 밀고 나가게 되는데 그 내용은 서구의 압력에 파행적으로 진행되는 근대화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적 인식이었다. 1960년대 경험한 4.19혁명 체험의 영향에 의해 더욱 공고화된 것이었다.
그에게 혁명은 민족 정신의 최고 정점이었으며, 역사의 승리였던 것이다. 이 순간의 체험은 혁명의 실패로 인한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또다시 역사적 승리의 순간,'동학'혁명의 순간을「금강」이라는 서사시로 다시 불러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서사시「금강」은 그에게 진보의 역사를 기억하는 회고담이면서 우리 민족의 혁명적 미래에 관한 기획이었던 것이다.
2. 반근대주의와 정신주의
등단작이 한 문인의 문학세계를 전반적으로 규명하는 예는 거의 드문일임에도 불구하고 신동엽의 경우는 이 등단작의 내용이 그의 후기 작품인「금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분석은 중요하다.
제목 중"대지'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것처럼 이 시에는 자연의 순리를 중요시하는 동양 철학적 세계관이 응축되어 있다.'돌아가 묻히겠어요, 양달진 당신의 꽃가슴으로, 아마 운명인가 봐요.그럼 안녕히'라는 구절이나 '오늘로 미친사람/내일로 바람자케//내일로 죽힌 사람/모레에 환생하케//하여 원수로 죽은사람/원수로 더불어 북수케하며'(제3화)라는 구절은 대지에서 태어나 대지로 돌아가는 모든 만물의 순리를 믿는 동양적 정신 세계와 인과론적 업보를 믿는 토착적 불교 신앙의 윤회 사상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이러한 종교적인 언명만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을에도, 등가죽에도, 방방곡곡 벋어 온 낙지의 발은/악착스레 착근하여 수렁이 되었나니//그렇다 오천년간 만주의는/백성의 허가 얻은 아름다움 도적이었나?라는 구절에서처럼 수탈의 역사에 대한 통탄이 들어 있다. 이는'보다 큰 집단은 보다 큰 체계를 건축하고/보다 큰 체계는 보다 큰 악을 양조한다.//조직은 형식을 강요하고/형식은 위조품을 모집한다//하여 전통은 궁궐안의 상전이 되고/조작된 권위는 주위를 침식한다//국경이며 탑이며 일만년 울타리며/죽 가래 밀어 바다로 몰아넣라'(제5화) 라는 시의 구절에더 더 구체적으로 들어난다.
그가 통찰한 수탈의 역사의 주요 동인은 '萬主義',즉 '體系'와 '組織'을 만들어 내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다분히 반근대주의적 이 시각은 그간의 이데올로기가 만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수탈을 정당화시키는 데만 일조하였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체계를 벗어나 인간 개개인의 자발성을 인정하는 휴머니즘에로 경도된다.
맛동 마을 농사집 태어나 말썽 없는 꾀벽동이로
딩굴 벙굴 자라서, 씨 뿌릴때 씨 뿌리고
걷워딜 때 걷워딜 듯, 이웃 말 어여쁜 아가씨와
짤랑짤랑 꽃가마도 타 보고,
환갑잔치엔 아들 손주 큰 절이나 받으면서
한 평생을 살다가 묻혀 가도록 내버려나 주었던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며
영원회귀 운운 이야기는 없어도
햇빛을 서로 누려 번갈아 태어나고
자넨 저 만큼
이낸 이 만큼
서로 이물을 두어
따 위에 눕고
사람과 사람과의
중복됨이 없이
흙에서 솟아
흙에서 흩어져 돌아갔을,
인생기생을 모를
사람들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제4회 중에서
위 시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삶의 양태는 '기생'이라고는 모르고 서로의 뜻한 바대로의 행동이 용인되는 유토피아적 사회의 것이다. 이 유토피아상은 단분히 무정부주의적인 것이다. 어떠한 이념이나 체계를 거부하는 사상인 무정부주의 사상은 한때 신동엽이 흠모했던 크로포크킨의 무정부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신동엽이 지향하는 유토피아를 만들어 가는 방법에는 정신적 참선이 하나의 중요한 방법으로 대두되고 있다
그의 대표적 시론「시인 정신론」이 제목엥서부터 보이는 정신주의적 면모는 그의 사상이 정신적 수양을 중시하는 동양철학에 보다 경도되어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찾아본다면 여러 시론이나『금강』의 주요 정신적 기반인 자연중심의 유기체적 세계관이나 무정부주의적 관점이 중심을 이루는 동양사상이 가장 중요한 그의 철학적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속적 욕망엥서 초월한 정신에서만이 헌신적 실천이 나올 수 있다고 신동엽은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빛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 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된 높은 의지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
산정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의 눈
깊게 높게
땅속서 스며나오듯한
말없는 그 눈빛
이승을 담아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버린
오, 인간정신미의
지고한 빛
-「빛나는 눈동자」중에서
4.19가 실패하고 난 이후에 쓴 이 시에는 시인 자신이 4.19의 실패로 인한 좌절과 절망을 애써 지우려고 한 노력이 역력히 보인다. 그가 선택한 좌절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바로 '정신'주의였다. 이 정신은 그의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에서 나오는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라는 구절에서의 그 '알맹이'이기도 하다. '알맹이' 즉 깨어있는 정신은 '세속된 표정을/개운히 떨어버린/승화된 높은 의지 가운데/빛나고 있는 눈'이라는 위 시의 구절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세속적 욕망을 버린 순결한,그리고 어떠한 체계에도 굴복하지 않는 고고한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을 통해서 그는 민중의 힘, 즉 자신의 억압적 체계를 전복할 수 있다는 인간 실천의 위대함을 깨달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제 문제는 여기서 신동엽의 한계가 싹트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만으로 실천이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점을 신동엽 자신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신과 실천과의 괴리를 없애는 것이 죽는 날까지의 과제가 아니었을까. 이러한 예가 그의 필생의 역작「금강」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3. '영원'에의 지향과 역사적 신념
당신의 말씀대로
정말 우리는 한 가지 목숨의
흐름일까요
이 세상은
우주에 있는 모든 생물은
한 가지 목숨의
강물일까요
그래서 죽음도,삶도
없는걸까요.
영원한 바람만 있는 걸까요,
정산을 향한.
당신도,나도
한 가지 강물의 흐름 위에
돋아난 잠깐의
표정일까요
그럼 구태여 혁명까지 조직하셨어요,
한 모서리 희생을 치러야 하는.
잘 모르겠어요,
당신을
-「금강」제25장 중에서
위의 시 구절은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금강의 주인공 신하늬의 생사를 모른채 아이를 낳은 신하늬의 부인 진아의 독백 부분이다. '우주에 있는 모든 생물은 한 가지 목숨의 강물'이라는 것,'그래서 죽음도, 삶도 없'이 영원의 바람만 있는 것이라는 언명은 동학이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주요 내용이다. 동학은 인간이나 자연물이나 모든 사물을 모두 동등한 위치로 존재론적 비중으로 인간과 자연을 유기체로 바라본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은 어떤 면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소중하다는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 사상으로만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소중한 만큼 자연 속의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생명 중심의 사상이다. 삶과 죽음이는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기에 인간적 삶의 세속적 욕망 역시 다 무의미한 것이다.
시인은「살덩이」라는 시에서 '오 비본질적인 것들의 괴로움이여'라는 시 구절로 세속적인 욕망에 휩쓸려 괴로워하는 현세의 삶의 덧없음을 한탄하고,「고향」이라는 시에서는 '우리, 돌아가야 할 고향은 딴 데 있었기 때문.....그렇지 않고서 이 세상이 이렇게 수선스럴 까닭이 없다'라는 구절로 인간의 본원적인 고향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분명 허무주의적인 것이다. 현실적 삶이 허무한 것이라면 유토피아의 현실적 실현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동엽은 현실적 유토피아에 대한 꿈을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신동엽의 이러한 이중적 고뇌 역시 4.19 세대의 특성으로 볼 수 있다. 혁명을 통해서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주체적 잠재성의 확인인 동시에 주체에 대한 환멸이었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얻을 수 있었던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이 무참히 무너져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갖게 되는 현실에 대한 환멸은 그 희망의 강도 만큼 깊은 상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환멸이 1960년대 문학 전반을 지배하는 무의식 깊숙이 자리 잡은 정신적 근원이라고 했을 때 이들의 세계관이 서구적인 것이든 동양적인 것이든 허무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허무주의는 물론 4.19 이전부터 형성되어 왔던 정신적 틀이지만 이러한 허무주의를 더욱 정당화시켰던 것은 암울한 현실 때문이라는 것 역시 비켜갈 수 없는 부분이다. 그가 허무주의 속에서도 현실적 전망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은 1960년대 어느 시인에게서도 볼 수 없는 현실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간암으로 자신의 목숨과 맞바뀌면서 십년을 들여서 만든 필생의 역작「금강」을 만들어 낸 이유이다. 결국 그의 시들은 자신의 허무주의와 싸워 가는 시인의 내적 고투의 산물이었다.
4. 문학사적 의의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신동엽의 문학은 그가 현실을 분석하는 도구로 선택했던 동양 철학적 사유와 그 사유 안에서 형성된 현실 대한 환멸을 자신의 역사적 신념을 통해서 극복하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동양 철학적 사유를 선택했던 것은 동양의 한 나라라는 우리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서구적 사유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중에서도 서구적 근대화에 대하여 가장 치열한 저항 의식을 가지고 있는 '동학'사상을 사유의 근본축으로 삼는다. 그러나 동학의 사유는 현실의 본질적 의의를 두기보다는 정신적인 피안의 세계를 근원으로 삼는 까닭에 자칫 현실에 대한 허무주의적 사유에 빠질 위험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4.19혁명이라는 역사적 체험은 그로 하여금 현실적 환멸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
그는 관념적 정신주의를 추구하는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역사의 진보를 신봉하였는데 이는 그가 4.19세대의 가장 정통적인 적자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의 서사시「금강」은 동양철학적 정신주의와 현실적 전망을 합치시키려는 그의 의식적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금강」의 가장 빛나는 지점은 주인공들이 겪었던 영혼의 가장 순일한 순간이 동학혁명,3.1운동,4.19라는 우리 민족사의 진정한 승리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에 기반하고 있었기에 그의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의 웅혼한 목소리가 보다 현실적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그는 1960년대 문학, 나아가 해방 후 한국시문학사 전체여서 가장 역사 의식이 투철했던 시인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직접 서술] 도서: 새로쓰는 한국시인론(백년글사랑,2003)